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덴마크-노르웨이 왕국 (문단 편집) ==== 독일의 [[30년 전쟁]] 개입 ==== 당시 독일은 [[합스부르크 제국|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지배를 받았지만 실제로는 각 제후들이 반(半) 독립 상태에 있었다. 그리고 AD 1517년 마르틴 루터로부터 촉발된 종교 개혁이 일어나자 로마 [[교황]]의 권위를 앞세운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통제에서 벗어나려는 제후들이 루터교로 개종하면서 독일 제후들은 가톨릭 세력과 프로테스탄트 세력으로 나뉜 채 서로 맞서게 되었다. 비록 AD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서 공식적인 화해가 이루어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앙금이 남았고 AD 17세기 초 각기 프로테스탄트 연합과 가톨릭 동맹을 결성하며 대립하였다. 그러던 중 AD 1618년 합스부르크 가문이 상속해온 또다른 국가인 [[보헤미아 왕국]]에서 가톨릭 신자인 [[페르디난트 2세|내지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의 지배를 거부하고 반란을 일으켰고 AD 1619년 11월 대표적인 프로테스탄트 제후인 [[팔츠 선제후국|팔츠]] [[선제후]] [[프리드리히 5세]]를 자신들의 왕으로 옹립하면서 '[[30년 전쟁]]'이 발발하였다. 그러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페르디난트 2세로 선출된 내지오스트리아 대공 페르디난트가 토벌에 나서면서 프리드리히 5세는 AD 1620년 11월 빌라호라 전투에서 [[요한 체르클라에스 폰 틸리]]의 가톨릭 동맹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채 보헤미아를 상실했고 AD 1623년에는 본래 영지인 [[팔츠 선제후국]]마저 상실한 채 네덜란드로 망명을 떠나야 했다. 한편 덴마크 국왕은 AD 1474년부터 신성 로마 제국의 홀슈타인 공작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의 지위를 함께 지니고 있었다. 이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제후들에게 이미 루터교를 국교로 선포한 덴마크가 큰 우호 세력 중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크리스티안 4세 역시 북독일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시키길 원하기 때문에 프리드리히 5세의 반란이 실패로 끝나면서 독일 내 프로테스탄트 세력이 위축되자 AD 1626년 스웨덴과 동맹을 맺은 후 신성 로마 제국의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내세우며 30년 전쟁에 전격적으로 참전하였다. 그렇지만 AD 1626년 8월의 루터 전투에서 페르디난트 2세가 고용한 용병대장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에게 대패하면서 북독일로 후퇴해야만 했다. AD 1627년 여름이 되자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 가톨릭 동맹의 틸리 백작 요한 체르클라에스와 연합하여 북독일로 진격하였고 덴마크령인 홀슈타인 공작령을 넘어서 슐레스비히 공작령과 [[유틀란트 반도]]까지 공격해 들어갔다. 비록 덴마크의 영토가 유틀란트 반도 뿐만 아니라 여러 개의 섬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해군력이 부족한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의 공세를 더 이상 허용하지 않았지만 AD 1628년 볼가스트 전투에서 또다시 패배하면서 북독일의 덴마크군은 모두 철수해야만 했다. 그러자 크리스티안 4세도 더이상의 전투를 포기한 채 AD 1629년 5월 뤼베크 조약을 체결해야만 했다. 비록 뤼베크 조약을 통해 모든 실지를 회복하는 데는 성공하지만 스웨덴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다시는 30년 전쟁에 개입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크리스티안 4세의 위신이 크게 손상당하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